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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베르디 탄생 2백주년에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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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
2013년은 이탈리아 출신의 국민적인 영웅인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탄생 200주년의 해로 여러 가지의 행사와 그를 추모하는 오페라무대가 예정되어 있어 베르디의 작품에 대한 연재를 시작 합니다.

베르디는 1813년 북부 이탈리아 작은 도시 ‘롱콜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푸치니처럼 대대로 내려오는 음악 집안도, 같은 해에 태어나서 종종 비교대상이 되는 독일의 바그너처럼 부모가 극장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지도 않았다.

어려서 음악을 좋아했고 재능도 보여주었지만 모차르트나 멘델스존의 어린 시절 천재성에 비교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12살 때 근방의 도시 부세토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유지 안토니오 바레치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밀라노로 유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첫 오페라인 ‘오베르토’가 스칼라 극장의 매니저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의 눈에 띄어 스칼라 극장과 3개의 작품을 계약하는 성공을 거두게 되고, 1836년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후원자인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다와 결혼한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잠깐이었고 1838년부터 차례로 딸과 아들 그리고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등졌고, 그의 두 번째 작품 ‘하루만의 임금님’마저 혹평과 함께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리며 쓰라린 고통 속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스칼라 극장의 지배인인 메렐리가 그에게 구약성서에 나오는 나부코 도노조르(느부갓네살 왕의 이탈리아식 이름)이야기를 주제로 한 오페라를 의뢰하여 1842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오페라 ‘나부코’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주변 강대국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나부코’의 3막에서 나오는 유대인들이 나라 잃은 설움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당시  이탈리아 현실과 대비되며 청중들에게 열광적인 환호와 동시에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가를 넘어 국민적인 영웅으로 대접받게 된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을 국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아리랑’과 같은 노래라 할 수 있다.

‘나부코’를 통해 재기에 성공한 베르디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재혼하고 1851년부터 1853년에 창작한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등 오페라역사상 가장 걸작이라 칭해지고,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그 후로도  그는 사망 할 때까지 ‘운명의 힘’ ‘가면무도회’ ‘돈 카를로’ ‘아이다’ ‘오셀로’ 등 수많은 명작을 발표했다.

1901년 베르디의 장례식에는 20만명의 인파가 모여 거장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조국통일의 염원을 노래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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