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사회
HOME  > 뉴스종합 > 사회

라 트라비아타 ①

컨텐츠 정보

본문

베르디의 18번째 오페라이며 '리골레또', '일 트로바토레'에 이어 춘희(椿姬)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진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베르디의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유명함과 동시에 가장 많이 상영된 오페라로 주저없이 꼽힌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연 된 유럽 오페라는 무엇일까? 바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이다.  "라 트라비아타"는 "길 잃은 여자"라는 뜻으로 주인공인 비올레타를 가리키며 프랑스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실존인물 마리 뒤플레시스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밤이면 밤마다 파리의 5대 극장 중 특별석에 나타나서 한 달의 25일 간은 흰 동백꽃, 나머지 5일간은 붉은 동백꽃을 가슴에 꽂음으로서 월경일을 돈 많은 호색한들에게 대담하게 밝혔던 그녀는 1850년 전후, 파리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마리 듀프레시스라는 매춘부였다.  
 
가난한 홀아비의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열두 살 때, 맨발에 누더기를 걸치고 파리로 올라왔다.  호색의 거리 파리에서 자기의 육체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마리는 처음으로 글을 배우며 사랑의 기교도 수련을 쌓은 덕분에 점점 상대가 고급화 되어 1년에 10만프랑의 돈을 버는 고급매춘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를 한때 열렬히 사랑한 남자가 “삼총사“와 “몬테 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뒤마 페르의 아들 알렉산드르 뒤마 피스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아버지와 함께 반년 동안 스페인 여행을 하고 돌아와 보니 마리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24세였던 뒤마 피스는 슬픔에 잠겨 울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것이 “동백꽃 여인”이었다. 소설은 가히 폭풍적인 인기를 끌고 뒤마 피스는 소설을 다시 극으로 고쳐서 상연했다.베르디가 이 연극을 보게 된 것은 1852년 2월 파리에서였는데, 당시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채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불안한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베르디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두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아 이를 오페라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의 대본으로 "동백꽃 여인"에서 "라 트라비아타" 로 새롭게 태어난 오페라는 1853년 3월 6일 베니스의 유서깊은 극장 라 페니체 오페라 하우스에서 역사적인 첫 공연을 갖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작품의 소재가 현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그대로 썼고, 무대 위에 윤락녀를 여주인공으로 등장시켰으며 초연 때 노래한 소프라노 가수가 도저히 폐병환자라고는 볼 수 없는 뚱보여서 폐렴으로 죽어가는 가련한 여인 비올레타 발레리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은 것이 실패의 첫째 이유였다. 그녀가 육중한 몸매를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무대는 자욱한 먼지로 가득했고 울어야 할 관객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하니 어떻게 제대로 된 공연이 가능했겠는가. 그러나 명작의 가치는 한 두 번의 실패로 흔들리지 않는 법. 문제된 소프라노를 교체하고, 시대설정을 1700년대로 옮긴 후에는 예의 베르디의 감동적인 음악이 청중들의 가슴깊은 곳을 울려 이 오페라의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곧 "라 트라비아타"는 전 유럽을 열광시키게 되었고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의 "라 트라비아타"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소프라노로 군림했던 그리스계 미국인 마리아 칼라스는 1950년대 초엽부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극장인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 발레리역을 하기 원했지만 번번히 쓰라린 좌절을 맛보아야 했는데, 그 이유는 라 스칼라 극장의 총감독인 안토니오 기링겔리 때문이었다. 광신적인 국수주의자 기링겔리에게 있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작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역을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그리스계 칼라스에게 맡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는 칼라스의 공연을 저지하기 위해 협박과 회유도 서슴치 않았다. 양측의 지리한 공방 끝에 결국 여론몰이로 기링겔리를 압박한 칼라스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지휘로 저 유명한 1955년의 공연을 성공리에 끝마치면서 라 스칼라 극장에서 비올레타를 노래하게 된 것이다.칼라스가 사라진 후 라 스칼라가 다시 "라 트라비아타"의 성공적인 공연을 갖기 까지는 거의 4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는데, 1960년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당시 30대의 신예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를 비올레타로 전격 캐스팅하여 시도한 "라 트라비아타" 부활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난채 카라얀의 캐스팅에 반발한 거물 소프라노 레나타 스코토의 라 스칼라 극장 고소 사건이라는 불미스런 기억만을 남기고 말았다. 
 
아바도의 뒤를 이어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리카르도 무티는 취임일성으로 베르디 오페라의 전작품을 새롭게 제작하여 공연함과 동시에 특별히 "라 트라비아타"의 부활을 힘주어 강조했는데, 결국 1992년에 젊은 가수들을 대거 기용한 공연이 청중들의 폭풍과 같은 호응 속에 대성공으로 끝남으로써 1955년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라 스칼라 극장의 "라 트라비아타"는 40여년만에 극적인 생환의 감격을 누렸고 청중들은 진정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부활을 소려높여 외쳤으니, 이처럼 "라 트라비아타"는 단순히 잘 만들어진 낭만주의 오페라일뿐만 아니라 실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국민 오페라'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18,310 / 1 페이지


인기 기사


사람들


주말N


최근기사


중부데일리TV


포토


기고/칼럼


기자수첩


만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