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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유를 잘 알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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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나오는 주유(周瑜)의 자는 공근(公瑾)으로서 기원 175년에 태어나 36세의 젊은 나이로 210년에 전쟁 후 귀환하다가 병사하였습니다.
 
주유는 삼국지연의에서 "하늘이 제갈량을 낳고 왜 또 나를 낳았는가"라는 말로 유명한데 제갈량의 신출귀몰하고 예지적인 능력으로 인해 놀림만 당하다가 적벽에서 승리하고도 분통에 못 이겨 죽는 것으로 나오는 인물입니다.
 
요즘으로 보면 성격이 불같고 자기 자만과 자존에 못 이겨 상처가 터져 죽는 것으로 나오는 그저 좀 똑똑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촉한정통론과 유비, 특히 제갈량을 높이기 위한 나관중 삼국지연의의 소설 내용일 뿐입니다.
 
조조가 양자강 이북을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양자강 이남의 점령을 위해서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남하할 때 장소 등 동오의 기득권자들은 항복을 주장합니다. 당연히 정권을 계승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손권은 정말 답답했지요. 즉 손견과 손책 이후의 권신들과 새로운 세력을 대표한 손권과 노숙, 주유 등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대세는 조조에게 항복하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정사 삼국지는 전합니다. 사실 그 이유 역시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고 장소 같은 이는 누구보다도 동오를 사랑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조조가 적벽으로 내려올 때 군사가 100만 대군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그의 주력인 청주병 10만 명과 나머지는 유표의 양양을 접수할 때 얻은 수군과 원술과의 전쟁에서 얻은 군대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조조가 동원해서 손권을 칠 수 있었던 병력은 많이 잡아주어도 15-20만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통일되지 않은 조조의 군사와, 원소 원술 형제의 군사 그리고 유표의 군사들이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이 병력들을 융합시킬 시간이 없었습니다.
 
특히 조조의 청주병이나 원소 원술 형제의 군대는 대부분이 북방의 군사였으므로 양자강과 같은 큰 강과 주위의 습지에 적응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는 군대였으며 특히 수전(水戰)에 대해서는 당시 채씨 형제의 군대인 유표의 수군 밖에는 없었으니 실제로 전쟁을 치르기가 쉽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젊은 주유는 대신들의 각종 의견을 물리치고 동오를 지키기 위해 조조와 싸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정치적 승리를 합니다. 물론 뒤에는 주군인 손권과 노숙의 도움 그리고 황개 등 일부 노장군들의 도움이 있었음은 삼국지연의와 유사합니다.
 
그럼 주유는 3-5만 밖에 안 되는 군사로 15-20만 즉 적게는 4배 많게는 5배 이상이 되는 조조의 군대를 이길 수 있다고 믿었을까요? 제가 볼 때 그는 정확한 분석을 통해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군대는 수전으로 단련된 군사였고 손책 이후 지속적인 영토 확장과 육지, 강 등에서의 실무적인 전투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던 군대였고 나름대로 명령체계와 훈련이 잘 이루어진 군대였습니다. 거기다가 많은 병사는 아니지만 유표의 아들 유종과 유비의 연합군이 약 1.5-2만 정도의 병력을 보탤 수 있었다고 하며 유비와 관우의 군대가 비록 조조에게 패해 물러나기는 했지만 하구에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연합을 청해서 조조의 대군에 대해서 약 5-7만의 군대로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통계와 숫자로 본다면 3만:15만 수준이었지만 실제 동원 병력을 감안하면 7만:15만 정도 수준으로 병력의 차이는 두 배 정도였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더군요. 조조는 상대적으로 북쪽의 변방과 동쪽의 변방 그리고 원소의 잔당과 수도 방어 등에 많은 병사를 두고 와야 했고 또 많은 참모와 장군들이 이를 책임져야 했으므로 참모와 장군 역시 A급들은 허창과 장안, 낙양 그리고 북, 동 변방에 주둔하였으므로 실제로는 자신의 전력 중 약 20% 정도만을 이끌고 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머지는 유표의 오합지졸들이지요.
 
삼국지연의는 촉한 정통론을 위해서 제갈량이 동풍을 빌고 동오의 권신들과 논쟁을 해서 누르고 적의 화살을 빌리고 유비의 각 장군들을 배치하여 정말 신기묘산의 전술로 조조를 무찌르고 주유는 그저 들러리로 뒤만 쫒아 다니다가 분사하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실제의 전쟁은 유비와 주유가 연합작전을 펴서 조조군을 효율적으로 무찌르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주공은 주유였고 유비는 좌측에서 조공을 한 것이고 이는 군사 수나 수군 그리고 전력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주유와 노숙은 큰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군인 손권에게 천하를 쥐게 해 주고 싶었지요. 주유는 형주를 빼앗은 후 장강의 이점을 살려 동오를 살찌우고 서천을 점령한 이후 한중으로 올라가 다시 장안부터 공격하면서 남쪽에서는 장강으로부터 쳐 올라가 양동작전을 하는 전략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보면 장강 이남과 촉, 파 지역을 점령하여 천하를 둘로 나누고 다시 마지막으로 조조와 한판 승부를 벌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하늘은 주유에게 천하제일의 미인이라고 전하는 교공의 딸 소교를 주었고 당시의 권력자인 손책과 동서를 만들도록 해 주었으며 동오의 수장인 손권과도 이러한 인연으로 항상 손권을 형처럼 돌볼 기회를 주었지만 그에게 긴 생명을 주지 않았습니다.
 
잦은 정벌과 피로감 그리고 동오의 세력을 넓히겠다는 그의 야심은 무장이었지만 몸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그의 육신을 갉아먹고 말았습니다. 그때의 나이로도 얼마 안 되는 35-36세의 나이에 손권을 두고 주유는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던 중 병사하고 맙니다. 아름다운 부인을 두고 마치 하늘이 두 가지를 주지 않음을 원망하듯이 허망하게 가고 마는 것이지요.
 
만약 주유가 10년 정도 더 살았다면 동오는 그렇게 수성으로 일관하며 손권 역시 꿈을 일어버린 용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유의 학문과 병법 그리고 전술은 사실 제갈량이나 순욱 혹은 곽가에 뒤지지 않는 것이었고
그를 이었던 육손이나 여몽보다도 훨씬 카리스마 있고 총명하여 가히 일국의 재상이 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제갈량의 동풍을 빌리는 것도 주유는 당시 양자강 유역에 동남풍이 일정한 시기에 부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배를 묶어서 연환계로 준비하는 조조의 군선들을 화공으로 태운 것입니다. 다만 삼국지연의처럼 조조에게 화공을 할 때에 병사들이 모두 배에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만약 그렇게 전멸을 시켰다면 유표의 군사를 거두고 바로 북상하여 쳐들어갔겠지요. 하지만 주유와 유비의 군대를 합쳐도 6-7만 수준이었고 상당부분이 수군이어서 실제로 육지에서 조조를 추격할 수 있는 군대는 3-4만 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에 방어는 가능했고 또 기습공격으로 조조에게 타격은 입혔지만 지속적으로 쳐들어 올라갈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손권과 유비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형주를 포함한 강하, 하구, 계양, 장사 부근 등 조조의 위험을 벗어난 주변 지역을 누가 빨리 더 전후처리 하여 자신의 영토로 흡수하는 가에 있었기 때문에 적벽까지는 연합이었으나 조조가 물러간 후 유비와 그의 군대는 자신의 영역 즉 처음으로 가지는 자신의 영토를 위해 분주히 뛰었고 손권과 주유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주유는 보고를 해야 했고 유비는 그 자신이 사령관이어서 바로 결정하고 자신의 것을 만들었지요. 거기다가 유표의 장자인 유기까지 자신에게 있으니 아마도 그 군대 1만까지 더해서 자신의 병력을 불리고 대의명분을 가지고 유표의 땅을 접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유는 오히려 손권보다 큰 야망과 꿈을 가진 사람으로서 제갈공명처럼 대전략을 머리에 넣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동오-형주-남방 안정-사천 진출-촉 접수-한중 접수-남쪽, 서쪽에서 북쪽, 동쪽으로의 양동작전을 머리에 두고 있었습니다. 또한 조조의 토벌로 흩어진 한중 위의 서량 강족과 연합하여 전략을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형주를 원했고 서천을 원했지만 그의 앞에는 유비와 제갈량이 있어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실수라면 유비의 세력을 좀 우습게 본 것 정도 아닐까 싶고 소설과 같이 분에 못 이겨 말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삼국 바로 후에 쓰인 책이고 각종 삼국지의 주해나 특히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명나라 초기 한족을 중심으로 한 한족정통론과 애국주의 그리고 명의 대의명분 확보와 원나라 및 몽고세력과 이민족 세력의 축출에서 나온 발상이므로 사실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고 그 전후의 정사 역시 왜곡이 많습니다.
 
주원장 역시 시정잡배로서 중노릇 까지 했으며 산적질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그의 개국황제의 롤 모델은 비슷한 처지였던 한의 유방이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한족 한나라 정통론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유난히도 유비와 제갈량을 위대한 모습으로 만들려다 보니 같은 한족인데도 애꿎은 조조와 손권 특히 주유 등 많은 인재들을 깎아 내리고 효웅을 만들거나 성미 급해 제풀에 죽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은 역시 이종티엔 교수의 생각처럼 삼국지에서 가장 억울한 누명을 많이 쓴 사람은 조조와 주유, 노숙 등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론으로 본 다면 우리는 주유를 옹졸하고 자존심 강하고 제갈량에 놀아나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그 대부분의 것은 허황된 소설 이야기이고 실제로 주유는 문무를 겸비한 강동지방의 명문의 아들로서 철저한 분석과 자연에 대한 이치를 깨닫고 있었던 그래서 적은 병력으로 조조의 대군을 무찌르고 동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던 하지만 안타깝게도 명이 짧아서 35이라는 젊은 나이에 병사한 동오의 기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미래를 향한 국가를 건설할 Vision이 있었습니다. 물론 손권과 함께 구상한 미래였지요. 그의 죽음으로 손권은 두 살 터울의 지기이자 신하이며 동료인 주유를 잃고 결국은 그 날개가 꺾이고 맙니다. 즉 자신의 꿈을 이룰 가장 중요한 동지이지 지지자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동오는 수성의 나라가 되고 지방의 정권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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