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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분노를 감싸 안을 수 있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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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본지 만 3주간이 지난 지금 시간까지도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만 떠올리면 소름이 돋아나는 걸 느낀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던 캐나다 영화 ‘그을린(Incendies)’을 이번에 개관10주년기념으로 ‘2010 씨네큐브 예술영화 프리미어 페스티벌’에서는 ‘그을린 사랑’이란 제목으로 다시 선을 보였다.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의 배경은 레바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기독교 민병대와 회교분리주의자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서 말이다.
 
‘그을린 사랑’은 첫 장면부터 집중하게 만드는 영화다. 고아원 원아들의 이발장면 모습을 감독은 카메라 렌즈를 고정해놓고 한 남자아이의 발뒤꿈치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그 소년의 발꿈치에는 세계의 작은 구멍을 불로 지진 상처가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 소년의 눈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공존하면서 카메라는 돌아간다. 감독이 좀 더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해 교차편집이라는 방법을 쓴 것 같다.
 
다시 영화는 두 쌍둥이 남매가 죽은 어머니(나왈 마르완)의 유언장의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대리인의 사무실을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유언장에는 쌍둥이 남매의 아버지와 형(오빠)을 찾은 후에라야 다른 두 통의 편지를 보여주기로 한다.
 
나왈 마르완의 발자취를 돌아가 보는 중에 서서히 남매는 어머니를 과거를 이해하게 된다. 가족이 기독교 민병대인데 반해 어머니는 회교분리주의자를 사랑한 결과 임신까지 하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손위 오빠들은 여동생의 애인을 총으로 사살해서 죽여 버린다.
 
   
 
사랑하는 연인을 오빠들에 의해 잃고 시름에 빠진 손녀딸이 임신까지 한 기막힌 현실을 알아차린 할머니의 넋이 나간 표정을 카메라는 한참동안 정지 상태로 보여준다.
 
하지만 현명한 할머니는 단호한 결단력을 보여준다. 여자도 배워야 제 몫을 할 수 있다면서 아이만 낳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내로 나가 삼촌이 운영하는 학교엘 입학해서 학업을 계속할 것을 손녀딸에게 당부하며 아기는 아무도 모르게 고아원에 맡겨둔다. 현명한 할머니는 산파역할까지 하면서 갓 태어난 아기의 발뒤꿈치에 조그만 세 개의 문신을 새겨 넣었던 것이다. 후에라도 아들을 찾을 때 엄마만 알아 볼 수 있는 징표로 말이다.
 
학업을 계속하면서 엄마는 의식 있고 지적인 엘리트 여성으로 변화되어 간다. 하지만 계속되는 내전은 학교라고해서 피해가지는 않는다. 학교도 내전으로 인해 문을 닫자 엄마는 아들이 맡겨졌던 고아원을 찾아 나선다.
 
고아원을 찾아가는 일도 고행의 연속이다. 목에 걸었던 십자가를 빼서 호주머니에 넣고 회교분리주의자들이 탄 버스를 세워함께 타고 목적지까지 향해 가던 중 기독교민병대의 검문에 응한 운전자를 총살을 하는 동시에 버스에도 무차별사격을 퍼붓는다.
 
버스 안에서 여자꼬마아이와 엄마. 그리고 주인공 나왈 마르완 이렇게 세 사람만 총격을 피해 살아나지만 기독교 민병대원들은 살아남은 이들과 시신들을 처리하기 위해 버스지붕에 있는 문을 통해 휘발유를 쏟아 붓고 불을 붙이려한다.
 
   
 
버스에 불이 붙기 전에 나왈 마르완은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십자가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고 나와 자기도 같은 기독교 민병대라고 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버스 안에서 탈출 할 때 어린 여자아이를 자기 아이처럼 꾸며서 억지로 끌고 나가지만 아이는 중간에서 다시 도망쳐 불타고 있는 버스 안에 갇혀있는 엄마한테로 달려간다.
 
   
 
자기 목숨보다도 엄마가 더 소중한 아이, 그 어린 꼬마아이를 향해서도 기독교 민병대는 총을 난사한다. 그 순간 절망감으로 여주인공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러면서 절망감은 다시 같은 기독교민병대원이지만 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변해간다. 여주인공과 같은 감정으로 관객인 나 또한 증오감으로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고행 끝에 어렵게 찾은 고아원은 불에 타 없어지고 도시는 전운의 흔적만 남아있고 아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고아원이 불에 타 버리기 전에 원생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증오감에 불탄 나왈 마르완은 기독교민병대장 자녀들의 불어과외교사를 자청해서 그의 집으로 들어가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파티 비슷한 것이 있던 어느 날, 나왈 마르완은 총을 숨기고 들어간다. 잠시 편안한 휴식을 즐기고 있던 기독교민병대장을 향해 권총을 발사한 후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그 다음 순간 바로 악명 높기로 유명한 기독교민병대 감옥에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지만 늘 노래를 부르면서 지내 노래하는 여죄수라는 애칭을 갖게 된다. 16년의 죄수생활로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진 상태에서도 노래를 그치지 않자 기독교민병대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고문기술자를 불러온다.
 
그 고문기술자는 내전 중에 사격솜씨가 뛰어나서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으며 기독교민병대와 회교분리주의자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일그러진 성격의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로 까지 변해있었던 것이다. 고문기술자의 모진 고문과 함께 자행된 성폭행으로 인해 나왈 마르완은 아기를 임신하게 된다.
 
출산은 미국계 간호사가 도와주어 이란성쌍둥이를 낳게 된다. 그 간호사는 노래하는 여죄수의 아이라서 아기들을 죽이지 않고 어딘가로 보내어 살려둔다.
 
회교분리주의자들의 영웅이 된 엄마는 그들의 영웅이었기에 그들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와 그녀가 감옥에서 낳았던 쌍둥이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보내진다.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고문에 의해 만들어진 자식들이지만 자기 몸 안에서 열 달을 지냈던 인연으로 그 아이들을 사랑하게 된다. 다정하게 잘 자라는 두 남매, 딸아이도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대학조교로 일하고 있다.
 
   
 
여가로 수영을 즐기는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수영을 하다가 갑자기 엄마가 의식을 잃는 일이 발생한다. 엄마가 수영을 하는데 남자들이 수영복만 입고 서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물속에서 보는 순간 어느 남자의 발뒤꿈치에 세 개의 구멍의 문신이 새겨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엄마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수영장 밖으로 나와서 그 남자 앞으로 다가간다.
 
그 순간……, 엄마는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병원에 입원을 하고 실어증에 걸린다.
 
   
 
대리인과 어머니가 수기로 주고받았던 유서가 공개되는 장면부터 이 영화 ‘그을린’ 의 마지막 수영장의 충격의 장면까지 2시간10분 동안 일분일초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엄마가 찾아보라고 했던 형과 아버지를 찾기 위한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면서 어머니의 생애와 아버지, 아니 형이었던 그 남자도 악덕고문기술자로 유명했던 본명을 버리고 개명을 한 후 기독교민병대의 주선으로 캐나다에 이민을 보냈던 것이다. 전범들이 과거를 지우듯이 말이다.
 
   
 
형과 아버지를 찾고 난 후에 편지를 개봉하라고 했던 약속을 지키며 편지를 읽어본다.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이 이야기의 시작이 어디일까.
그 시작이 너희가 태어난 순간부터라면 슬픔이겠지.
하지만 이 이야기의 시작이 너희의 형이 태어난 순간부터라면 이 이야기는 사랑일거란다.”
라고 말하며 아빠와 형을 찾으라 했던 것은 분노의 끈을 끊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사랑과 화해를 강조한 감독의 메시지 모든 분노를 감싸않을 수 있는 사랑, 내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또 다른 편지 두통은 아들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였던 고문기술자에게 보내진다.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 자신이 분노와 좌절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죽기 전에 애타게 찾았던 사랑하는 아들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였던 악덕고문기술자를 용서하는 편지.
 
두 통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아들의 모습과 고문기술자의 일그러지는 얼굴표정을 보면서 그 남자의 생이 참으로 가여워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전쟁은 늙은이들이 일으키고 죄 없는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다. 전쟁 나면 부모가 자식의 장례를 치루지만 평화로울 때에는 순리대로 자식이 부모의 장례를 치루는 것이다. 이 세상에 유익하고 착한 전쟁이란 없다는 생각이다.
 
   
 
하느님은 온 인류를 공평하게 사랑하시지 기독교인만 사랑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그 분의 자녀들이 아닌가. 그런데 왜 서로 총을 겨누고 해야 할까? 정치권력을 가진 집단들의 이해득실에 의해 선량한 많은 시민들이 무고하게 죽어가야 한다면 우리는 강하게 거부해야만 한다. 총칼, 거기에다 권력과 돈, 사기로 흥한 자 그 것들에 의해 망하리라.
 
분노를 끊어버리기 위해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해야한다. 남북이, 동서가, 이웃이, 가족이……,
 
이 영화 참 별 열 개도 더 주고 싶은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를 생각해봤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었다.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상냥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완벽하다. 
상냥한 사람은 이 세계의 한 곳에만 애정을 고정시켰고, 
강한 사람은 모든 장소들에 애정을 확장했고, 
완전한 인간은 자신의 고향을 소멸시켰다.
-Hugo of St. Victor, Didascalicon-(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인용. )
 
지구촌 가족이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날을 오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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