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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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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 닷새 이상이 지난 지금도 신기하게 영화 ‘시’는 내 가슴 속 한자리에 ‘웅웅’이라는 폴더를 만들고 자리를 잡았나보다. 길을 걷다가도, 바다를 보면서도, 월요일 출근길에서도 ‘웅웅’ 거리며 나를 깨운다.
 
좋은 영화나 책은 보고, 읽고 난 후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메모해두어야 그 감동이 살아있음을 알기에 바로 간단한 메모를 해두곤 하는데 이번엔 마냥 게으름을 피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닷새 전 본  이창동 감독의 ‘시’는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 지워지지 않고 가슴속에 뜨겁게 각인을 남긴 작품 가운데 하나다.
 
영화 ‘시’의 영어제목이 ‘Poem’이 아니라 'Poetry' 로 자막이 나오기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한참이나 생각해봤다. 작품으로서의 시가 아닌 즉 장르개념의 추상적 의미의 시로 아름다움을 향하는 자세인 이유를 영화를 다 감상하고 난 후에라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여백들을 내가 함께 채워낼 때 비로소 나와 영화 ‘시’가 만나 완성된다는 느낌이랄까? 막연하게 시를 쓰는 것이 아닌 시를 쓰는 일은 이해와 소통을 향한 열망이며 고통 받는 자신과 타인의 내면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자기의지의 표현임을, 그리고 우리의 삶 또한 시와 같아야함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감상하면서 시에 대한 내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립해봤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원로 영화배우 윤정희 씨의 연기에 대한 기대감과 한국영화를 처음 인정했던 작품이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였기에 그 분의 작품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꼭 극장엘 찾아가서 다 봤음은 물론이다. 소설가일 때 이창동 씨가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단편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란 작품을 읽고 참 마음이 따뜻한 작가다란 생각을 했었다. 80년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박하사탕’과 장애우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아냈던 문소리 주연의 ‘오아시스’ 파렴치한 종교인과 원죄에 대한 깊은 고뇌를 표현했던 전도연 주연의 ‘밀양’ 등 불합리한 사회구조 속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군더더기 없이 담아내는 이창동감독의 영화는 이 야만의 시대에 한줄기 빛처럼 강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영화 속 미자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이혼한 딸의 중학생아들을 맡아 기르며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늘 외출할 때는 예쁜 모자를 쓰고 공주 같은 옷차림을 하고 나가 곤 한다. 문학소녀였던 학창시절을 그리워하며 마을문화회관에서 시 창작교실 강좌도 듣는 낭만주의와 낙천주의가 반반 결합된 주인공 미자씨.(윤정희 씨의 본명이 손미자인데 영화에서 실명을 쓴다) 주 2~3일은 중풍에 걸린 남자노인의 간병을 하면서 돈을 벌기도 한다.
 
   
 
실제로 시 강좌 강사로는 섬진강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이 김용탁 시인으로 출연해 자연스런 시 강좌 연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가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고 실제 우리네 생활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냥 평범한 이웃들이 함께 출연해 자연스럽게 일상을 연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미자는 문학소녀할머니다. 비록 현실적인 삶은 고되더라도 말이다. 배우 윤정희 씨는 미자 역을 맡아 열연이라기보다는 생활의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표정연기와 남편을 따라서 유럽에서 오래 생활한 때문인지 예순을 훨씬 넘긴 할머니 음성이 아닌 이 영화의 콘셉트와도 맞는 시를 사랑하고 시를 배우려고 하는 소녀취향의 할머니와에 맞는 약간 혀 짧은 불어를 하는 듯한 모습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난다.
 
아마 다른 영화였더라면 윤정희 씨 특유의 억양으로 인해 캐스팅되기 어려울 그런 음성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창동 씨가 김혜자 씨나 고두심 씨 그리고 김해숙 씨를 제쳐두고 유럽에서 생활하는 윤정희 씨를 캐스팅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실제로 중풍에 걸려 투병중인 왕년의 영화배우 김희라 씨가 중풍 걸린 회장님으로 출연해서 호연을 한다. 미자가 간병을 하고 있는 회장님 역할이다.
 
   
 
어느 날 시상을 떠 올리기 위해 강가로 산책을 나가던 중 강물에 떠내려 온 여학생의 시신을 발견한다. 강 둔치에서 놀던 아이들이 놀라서 경찰에 신고를 하고 팔이 저릿저릿한 증세로 동네 병원을 찾았던 미자는 이 여학생의 엄마가 병원 영안실 앞에서 119구급차로 실려 온 죽은 딸아이의 시신을 보고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헛소리를 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본다. 미자의 손자를 포함한 같은 학교 남학생 여러 명이 학교 과학실에서 여학생을 성폭행 하자 이 여학생이 수치심을 못 견뎌 강물에 뛰어 들어 자살을 한 것이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미자는 절망한다. 아네스(자살한 여학생의 세례명)를 위한 연미사를 드리고 있는 성당엘 가서 아네스의 작은 영정사진을 몰래 가져온 후 식탁위에 올려놓고 손자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유도하지만 미자의 바램과는 달리 손자는 딴 짓만 한다.
 
여학생을 성폭행한 남학생들의 학부모들이 모여 소위 대책회의란 걸 하는데 모두 아버지들만이 참석하고 여자는 미자가 유일한 참석자다. 자기 아들들의 비위사실이 알려질까 노심초사하는 아버지들과는 달리 미자는 죽은 여학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죽은 여학생의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한 학생당 오백만원씩 합의금을 내기로 한다. 생활이 곤궁한 미자는 돈 마련이 어려워지자 언젠가 회장님 목욕을 시키기 전에 회장님이 비아그라를 입에 털어놓고 간병인 미자가 목욕시켜줄 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했던 음흉한 모습의 회장님을 떠올리며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결심을 한다. 회장님한테 비아그라를 먹이고 자기의 몸을 스스로 허락하는 것이었다. 중풍에 걸려 중증인 남자노인네의 욕망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죽기 전에 한번만 남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회장님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준 미자. 그 대가로 현찰 오백만원을 요구한다.
 
실제로도 중풍에 걸려 투병중인 배우 김희라 씨를 캐스팅한 이창동 감독의 남다름이 존경스럽다. 왕년에 잘 나갔던 영화배우답게 중풍환자이긴 하지만 그 아픈 몸으로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내는 김희라 씨의 프로정신을 보면서 눈물겹도록 가슴이 아파왔다.
 
매춘 아닌 매춘의 대가로 손자의 합의금을 마련해준 미자는 심한 자기 모멸감에 빠져든다.
 
   
 
미자는 시를 쓰기 위해 다시 강가로 나온다. 비가 내리고 시를 쓰기위해 펼쳐든 노트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번져나간다. 번져 나가는 빗방울과 함께 내 눈자위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자는 강의 마지막 날까지 시 한편씩 제출하라는 김용탁 시인의 숙제를 해온 유일한 학생이었다. 시 제목은 아네스에게 보내는 시다.
 
그 시를 남기고 미자는 세상 밖으로 사라졌다. 이 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불의를 등에 지고서 말이다.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았기에 죽은 아네스처럼 강에다 몸을 던졌는지 부엉이바위 같은 바위위에 올라 몸을 던졌는지는 관객 아무도 모른다. 가난이나 고통이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치욕이 사람을 사지로 내 모는 것이 아닐까?
 
   
 
영화 ‘시’는 칸 영화제가 극찬할 만한 영화 맞다. 지구상에서 상위 인권국가에 속하는 프랑스가 주체국인 칸 영화제의 품격은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와는 격이 다르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영화 ‘시’에게 각본상을 안겨준 칸 영화제에 감사했다. 사람의 모습은 달라도 인간이 늘 먼저임을 생각할 줄 휴머니스트들의 마음은 세상 어디에 살든 다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잘 만든 영화, 좋은 영화에 관객이 많이 들지 않음이 유감이긴 하지만 두 시간 이상을 투자해서 봐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영화 맞다.
 
 
아네스의 노래 / 이창동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영화 '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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