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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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읽었던 백가쟁명을 통해 노자와 장자가 하나로 묶일 수 없음은 알았다. 흔히 노장사상이 도가사상이며 노자의 도가 장자의 나비의 꿈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이제껏 배워온 바다. 무위자연, 도를 도라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도가는 자연스럽게 선과 연결되어 마치 모든 선의 바탕이 되는 듯 느껴졌었다.
하지만 노자의 도는 선에서 추구하는 도가 아니다. 노자는 철저한 정치철학자였으며 노자의 도는 통치개념으로서의 도이지 개인수양으로서의 도가 아닌 것이다. 노자는 통치자들에게 무위를 권한다. 무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은거의 개념이 아니다. 세상에 자꾸 무언가 규칙과 법칙과 등등의 제재수단을 만들 필요가 없으며, 스스로 모든 것들이 가지런히 돌아갈 수 있게 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통치자는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무언가를 하지 말고 도의 자리에 있으면 절로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무위로 통치하라는 유위의 개념이다.
장자는 전혀 다르다. 장자는 통치를 위한 이념을 말하지 않는다. 도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가 속해있는 시스템 - 가족, 사회, 정치, 국가, 도덕, 문화 등 -에서 온전히 벗어날 때, 그리고 벗어난 상태에서의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나와 외부를 깨달아가는 것, 그래서 도란 계속 걸어가며 만들어가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장자에게는 통치자가 아니라 사람이 중요 화두인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 속세를 잊고 지내라는 도피가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과 개인이 부딪혀 자신을 속박하는 의식, 무의식의 제한을 걷어내고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이 되어 타자와의 소통을 시도하라는 적극적인 소통의 철학이다.
결국 나를 볼 수 있는 것은 타자와의 마주침이 시작이며 평생을 혼자 살아갈 수 없다면 내부의 막을 걷어내고 외부와의 연대를 모색하라는 실천적인 철학이다.
철저히 국가와 통치자가 우선인 노자와 개인을 제한하는 모든 시스템이 허황된 꿈일 뿐이라는 장자는 오히려 대립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농구공을 손가락하나로 바치고 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농구공을 돌리고 있는 손가락은 그리 바쁠 것 없어 보이지만 실상 돌아가는 농구공의 중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가락은 미세하지만 아주 바삐 움직이고 있다.
그 손가락처럼 우리는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도 감지할 수 있어야한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부딪힘이 있을 때이다. 부딪힘은 다른 사람들, 다른 생각들, 다른 가치들에서 일어난다. 그 때 잠시 우리의 생각이 정지되는 시점이 생겨난다. 한 대 얻어맞은 듯이…. 그리고 그 정지상태에서 내게 부딪혀온 다른 것들에게 초점이 옮겨간다. 받아들임이 가능해진다.
말은 간단하지만 생각정지상태까지 오려면 내 마음의 고통은 얼마나 클 것인가…. 나의 내부가 외부로 온전히 향할 수 있을 만큼 비어지려면 내가 나라고 고집하며 지키고 있던 많은 에고들을 인식해야 할 터인데 내가 고집하는 부분을 인식조차하지 못하고 있음에야….
장자의 바람이 춘추전국시대보다 더 혼란스럽고 더 세분화되고 더 물질적인 이 시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무수히 외로운 이 시대의 새로운 관계맺기와 새로운 연대의 모색에 큰 바람이 될 수 있기를….
그 이전에 이렇게 장자를 찾아보고 느껴보고 시도해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나를 낯섦으로, 낯설어서 두렵지만 그 보다 큰 설렘으로 다가설 수 있기를….
그렇게 장자를 만났다. 아니 막 만남을 시작했다. 그가 펼쳐놓은 세계로 그의 흔적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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