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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누구의 아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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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하고 그리고 현실적인 전제국가를 처음으로 건국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잘 알듯이 진시황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진시황(秦始皇: Qin Shi Huang)은 전국 칠웅인 제(齐),초(楚),연(燕),한(韩),진(晋),조(赵),진(秦) 6국을 하나의 나라로 다시 통일한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황제이지요. 그래서 이름도 본인이 처음으로 시작하는 황제라고 하여 진의 시황제라고 정한 것이지요. 춘추전국까지만 해도 황제는 사용한 적이 없었던 휘호이니까 그전의 황제(黄帝)는 황제를 뜻하는 황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시황 영정(嬴政)을 당대의 유명한 정치가인 여불위(吕不韦)의 사생아라고 이야기 하고는 합니다. 실제로 몇 년 전 방송되었던 진시황에 대한 중국CCTV에서도 여불위가 자신의 애첩이었던 조희와 사통한 후 그녀를 당시 볼모로 초나라에 와있던 진시황의 아버지인 자초에게 보내는 것으로 나오더군요. 물론 이 설이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마천의 사기에도 이 부분이 여불위 전에 서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금은 애매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진시황의 비밀』이라는 리카이위엔이라는 학자의 책을 보면 상당히 학술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논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국 7웅의 하나인 초나라에 이와 상당히 유사한 Story가 거의 같은 내용으로 진시황 때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의 여부를 떠나서 초나라 고열왕의 왕비에 대한 이야기인데 보면 상당히 신빙성 있고 이 이야기가 훨씬 상세하여 여불위와 진시황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의 내용이고 원조임을 추측할 수 있지요. 하지만 왜 사마천은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썼을까요? 태사령이라는 직위와 역사에 대한 그의 철저한 사고방식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사실 사마천 역시 이를 진시황 본기에서 다룬 것은 아니고 여불위열전에서 짤막하게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고열왕과 춘신군 그리고 이완의 스캔들 고사는 상당히 자세하게 춘신군열전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마천은 이러한 민간의 이야기를 올린 정도이고 실제의 판단은 후세에 맡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아도 여러분이라면 이미 임신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남에게 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 자초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그 정도도 모를 만큼 바보였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볼모였다고 하더라도 자초는 진과 초의 300년 결혼 동맹이 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초에 머물렀었고 나름대로 남의 애첩을 내용도 모르고 받아들일 만한 사정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우습게 지나칠 수 있지만 당시의 정조관념이나 왕족들의 자손에 대한 처절한 집념과 엄청나게 엄격한 여인에 대한 검사와 확인을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기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여불위와 조희가 만난 시기와 자초와 조희가 만난 시기 그리고 여불위의 인간됨이나 여러 가지 상황을 살펴보면 또한 진시황이 정권을 잡고 친정을 하면서 후에 여불위에 대한 조치 등을 보면 그가 친부라고 보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입니다. 마치 건륭제가 한족의 자식이었다는 오래된 민간 전설과 같다고나 할까요? 진시황이 어릴 때 자초의 사망으로 즉위한 이후 여불위와 조희가 사통한 것까지는 거짓이라고 하기 어렵더라도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자기 자신의 혈육을 황제를 시키기 위해서 그랬다고 하기에는 비약이 너무 크고 만약 발각되었을 경우에 그 죄가 너무 막심하여 과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럼 이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졌을까요? 저자가 말하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유방은 진을 무너뜨리고 한을 세웠지만 진시황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롤 모델로 생각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엄격한 법 집행의 일부분을 빼고는 대부분의 제도와 영토 그리고 거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한나라 무제까지는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그 기간은 약 150년 정도가 되지요.
 
한 무제는 기강이 많이 무너지고 외척이 득세하는 한나라를 다시 부흥시킨 인물입니다. 그리고 제자백가를 없애고 유가를 국가의 기본 통치이념으로 세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때부터 진시황에 대한 많은 오해가 생겼고 이는 진시황이 세운 진을 사생아가 세운 나라로 비하하고 한나라야말로 황제의 적통을 이어받은 나라라는 적통설을 세우기 위한 방편이기도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작가의 생각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진시황의 분서 갱유는 그 규모나 대상이 상당히 많이 왜곡되었고 진시황의 제도나 각종 통일 국가의 기초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중국을 지배했습니다. 지금의 중국의 성과 직할시의 구분 역시 변방을 제외하면 진나라 때와 큰 차이가 없다고들 하지요. 
 
하지만 그가 폭군이고 문제가 많다는 것으로 도배를 한 시대는 사마천이 생존하던 한 무제 때입니다. 사마천은 이러한 당시의 풍조를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본기에서는 정사의 내용만 써서 기록하고 여불위 열전 같은 곳에서만 이러한 당시의 스캔들이나 민간의 소문 전설 등을 소개한 것이지요.  
 
이러한 여러 가지 내용을 보면서 저 역시 작가와 같은 생각을 해 봅니다. 본기의 내용은 정사적 측면이 강하고 열전은 그야말로 열외적인 변방의 국가, 인물 그리고 여러가지 그 진실이 의구시되는 것에 많이 사용됩니다. (참고로 고조선은 사기에는 조선열전에 실려 있으며 그 내용은 상당히 적고 빈약합니다.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것으로 기록이 나오고 있는데 고구려 동방정벌과 같은 큰 전쟁은 아니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일단 한나라의 역사를 주관하는 태사령의 입장에서는 조선은 열전 정도에 기록할 만한 내용인 것으로 판단한 것이지요)
 
춘신군 스캔들은 많은 책에서 찾을 수 있지만 여불위와 진시황 영정의 이야기는 사기를 제외하고는 사마천 이전 시대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사마천은 그냥 이러한 이야기를 당시의 민간 풍문을 기록한 정도로 마치지 않았을까 싶고 또한 자신의 역사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그리고 자신을 궁형에 처했던 한 무제의 편협한 사관을 경멸하여 춘신군 열전과 여불위열전에 이를 각각 쓰고 가장 중요한 정사인 본기 즉 진시황 본기에는 이를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종의 방어책이라고 해도 될까요?
 
사실 진시황은 그의 무덤이 발굴되면 알 수 있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듯이 단순한 폭군은 아닙니다. 그가 권한을 가지고 진짜 황제노릇을 한 기간은 약 10-15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25까지는 외척세력과 여불위 그리고 그의 어머니인 조태후 때문에 자신의 기치를 펴기 어려웠지요. 노애의 반란으로 이름지어진 조태후와 노애의 사통과 이로 인한 그들의 반란을 제거하고 여불위를 숙청한 후 진시황은 외척세력에서 벗어납니다.
 
그는 평생 정식의 황후를 두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와 화양태후 또는 창평군 등 각종 외척세력에 대해서 너무도 질렸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13세가 못되어 황제가 된 후 약 13-14년을 이를 인내로 버팁니다. 그리고서 그 기간 동안 자신의 사람과 조직을 만들어갑니다. 실제로 그가 완전한 권한을 잡은 20대 후반부터 진나라는 엄청난 속도로 나머지 6국을 병합하며 6국 통일 이후에도 진시황의 각종 정책을 보면 정말 미리 미리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과 많은 준비를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자의 통일과 도량형의 통일, 역법의 제정과 황제를 위주로 한 정부 체제, 군현을 나누는 중앙집권제도 등등 그 이전의 나라들이 해 본적이 없던 완전한 새로운 통일왕국의 준비를 그는 어쩌면 아주 어릴 때부터 외롭게 시작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죽이고 묻어버린 유생들 즉 갱유는 사실은 그를 속인 불사초를 파는 방사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가 없앤 분서 즉 책 역시 당시의 통일 왕국을 구성하려면 어쩔 수 없었을 선택이 아니었난 생각해 봅니다. 그의 잘못은 분명히 있지만 사실은 그의 영웅적인 모습과 뛰어남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난 번 회사의 원자재인 Magnesium업체와 협상을 하려고 중국 서안(西安: Xian An)에 1박 2일로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비행기 시간이 오전 밖에는 없더군요. 협력업체와 약속은 저녁인데 정작 서안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밖에 되지가 않았습니다. 그 동안 몇 번을 갔었는데도 못 들어갔던 섬서성 박물관 (陕西省博物馆)을 드디어 가 보았고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있어서 서안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진시황의 병마용을 또 갔었습니다. 
 
병마용은 서안을 네 번 간 동안 네 번 모두 가 보았으니 이번에는 다섯번째가 되는군요. 아주 작정을 하고 공항에서 내려서 협력업체에서 보내준 차량을 타고 바로 시내를 거치지 않고 병마용으로 향해서 가지고 간 망원렌즈(500mm)로 병마용을 처음으로 상세하게 관찰했습니다. 여러 번 가본 덕에 병마용 박물관이나 2,3호 갱은 가지 않았고 1호 갱만 가서 진용(秦俑)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조금 흔들린 부분은 아무래도 날씨가 약간 흐렸고 내부가 그리 밝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삼각대로 고정을 했지만 주위의 시선도 있고 플래시는 켤 수 없었던 까닭에 또 늦게 서안으로 돌아가면 박물관을 또 못갈 것 같아서……. 무척 피곤하고 힘들었는데 열심히 찍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일을 잊고 고대 역사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병마용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제 블로그의 다른 포스트에 많이 있으므로 그걸 보시도록 하고 사진을 감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잘 찍지 못한 사진이지만 병마용 개개인의 다양성은 충분히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머리 모양이나 신발, 뒷 모습, 말꼬리, 병사들의 표정 등을 유심히 한번 관찰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병마용을 방문해도 망원렌즈가 없으면 거리가 멀어서 상세한 것을 보기 힘들고 그러하기에 많은 분들이 실망하고 돌아오고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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