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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왜 황제가 되지 않았을까?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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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에 조조평전과 조조 무덤의 발굴이야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내용은 조조평전과 발굴 이야기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평범한 제가 그냥 이런 저런 책을 통해 느낀 바와 조조라는 영웅의 생각을 쫒아가는 개인적 추적이라고 생각하고 읽어 주시고 또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니 상세한 부분에 틀린 것들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조조의 자는 맹덕으로서 후한 말엽 환관 집안의 자손입니다. 조조의 할아버지가 환관이었으니 조조의 아버지는 양자였고 사실 혈연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실제로 조조의 아버지와 조조는 조씨가 아니라 하후씨라고 하더군요.
 
맞다 틀리다를 떠나 일단 조조의 아버지가 양자인 것은 맞으니 조씨 집안의 같은 성씨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집안의 정통 적자는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조조는 원소 형제와 같은 명망 있는 가문의 유력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지금의 대위급인 북부도위 그러니까 파출소장 정도의 직위로 관직을 시작합니다. 조조가 고관대작의 자녀들에게도 법집행을 위해 몽둥이질을 하고 청렴하고 강직한 관료였다는 것은 이미 조조평전에서 설명하였기에 다시 보충하지는 않겠습니다.
 
조조는 황건적의 난이나 대 동탁 토벌전과 관도전쟁 그리고 각종 전쟁을 통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서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가 됩니다. 당연히 원소, 원술, 손책, 유표, 동탁, 마등, 유장, 공손찬 등과 대립할 초기에는 후한의 황제였던 헌제를 데리고 와서 그의 권위와 한실 부흥이라는 대의명분을 지킬 필요가 있었으므로 재상으로서 위왕으로서 2인자의 위치에서 천하를 논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살해하려고 했던(실제 정사에는 이도 사실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후한의 황제와 많은 정적들을 적절하게 처리한 후 원소와의 관도대전과 오환 및 동호 정벌을 끝낸 이후라면 사실 굳이 황제를 끼고 있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삼국 3대 대전인 관도대전 이후에는 중원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였고 마등, 마초의 서량을 정벌하고 한중까지 들이 닥쳤던 시절이라면 기존의 다른 역성혁명의 성공자들과 같이 새로운 왕조를 열었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의 황제를 죽이지도 않았고 굳이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사 삼국지는 조조의 장자인 조비가 위 문제로 황제가 된 이후 조조를 위무제로 추서하였다고 되어있는데 사실 재작년 12월에 발굴이 된 조조의 무덤이라고 거의 확실시 되는 조조의 무덤에 들어있는 명문들과 기록은 위왕(魏王)이라고 그대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쓰여 있네요. 위무왕이 자주 사용하였던…….
 
   
   
   
 
이것이 그나마 있는 보석들입니다.
 
   
 
자신이 썼던 칼이나 창 등에 돌 표식을 하였습니다. 옥도 아니고 말입니다.
 
조조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을 테고 아들인 조비가 아직 황제로 등극하기 전이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조조는 무덤에 가서도 위왕으로서 칭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왕의 발상은 대부분 3년 이후이고 아들이 지극히 효성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리고 정사 삼국지의 내용을 보면 조비는 분명히 아버지를 위무제로 추서하고 싶어 했고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무덤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는 아버지인 조조의 유지가 아니었을까요?
 
진시황처럼 아들의 왕조가 만대를 갈 것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 위인이고 자신의 무덤도 결국 파헤쳐 질 것이라고 잘 알고 있었을 사람이기에  칭제는 죽어서라도 하지 않도록 조조가 유언을 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중국 서쪽의 한개 주를 차지한 유비가 칭제를 하고 두 개주를 차지한 손권이 칭제를 한 것에 비하면 물론 위의 두 사람은 조비가 위문제가 된 것에 대해서 칭제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사안입니다.
 
사람이라면 무릇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조조가 평생을 추구한 새로운 질서의 구축과 인재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리고 미래에 대한 준비 등을 볼 때 분명히 조조가 죽기 전 4-5년 전에 칭제를 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면 사실 위나라는 개국 황제 이후 2대 황제인 조비부터 더욱 발전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정적도 제거했고 눈의 가시 같았던 유비와 제갈량 그리고 관우가 차지했던 형주도 빼앗았고 관우도 없앴습니다. 손권의 동오도 그 기간 동안 고분고분 했습니다. 얼마 후 조조가 죽기는 했지만 사실 말년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년 정도의 기간은 충분히 칭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대비하여 처첩의 후사를 적어놓고 죽은 후 자신의 무덤과 장례절차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준비하고 아들들의 내분을 방지하기 위해 조비를 위주로 정권도 다 정리해 놓았습니다. 완벽하게 다음 세대의 준비를 해 놓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왜 그는 황제가 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마치 다른 모든 것을 하고서 마지막 용의 눈을 그리지 않은 것 같아서 허전하기도 합니다.
 
저는 삼국지 강의로 유명한 역(이)종천(易中天)교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조조는 다른 개국 황제들 그러니까 진의 시황제인 영정이나 한의 고조인 유방, 당 고조 이연, 송 태조 조광윤, 명 태조 주원장, 원의 칭기즈칸이나 세조 쿠빌라이, 청의 누르하치 등 중국의 중원과 전체를 통일한 다른 어떤 황제보다도 학문이 높았고 수준이 있었으며 무예 또한 대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잘 아시듯이 진시황은 황태자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태자 수업을 받은 정도인데 어릴 때 13살에 등극하여 자신이 권력을 갖기까지 여불위와 어머니인 조황후의 눈치를 보아야 했으므로 실제로 대단한 학문을 쌓을 시간이 없었고 또 완숙기인 49세에 짧은 인생을 마치므로 사실 학문이랄 수준이 없었습니다.
 
원대한 생각과 이후 2천년의 제도의 기초 즉 관할 지역과 군현제, 문자의 통일과 도량형, 화폐의 통일 등 수많은 준비는 학문도 중요했지만 현실의 경험도 중요했던 일이므로 행정으로서 천재성을 보인 것이지 결코 수준 높은 사람이라고 하기 어려웠습니다. 당연히 사대부로서 살아본 적도 없지요.
 
한고조 유방과 명 태조 주원장이야 시정의 건달이었거나 주원장 같은 경우는 심지어 중노릇까지 하였으니 그 사람들에게서 학문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이민족인 칭기즈칸이나 중원에서 원을 세운 세조 역시 이민족으로 학문을 논하기 어려웠고 말 달리던 만주족인 누르하치는 아마 한문도 잘 읽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태평성세의 대표 세계 최강의 중국을 연 당의 태조 이세연은 실제로 한족이 아닌 선비의 일족으로 알려져 있고 실질적인 개국황제 당태종 이세민도 정관정요를 지을 만큼 학문이 있기는 했지만 행정 및 국가 운영을 위한 것이었을 뿐 수 없는 전쟁을 하면서 대단한 문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송 태조 주원장 역시 당말의 절도사였으므로 무관이었기에 대단한 학문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개국 황제들을 기준으로 보면 조조는 몰락한 집안의 적손으로서 사대부이기는 했지만 정통 사대부들은 비웃을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집안사람이었고 젊었을 때는 노는 것을 좋아하는 한량 짓도 많이 했습니다. 그가 중원의 주요인물로 떠오르면서 마치 많은 학문을 한 번에 배운 것처럼 그는 시와 문장 그리고 병법과 거의 전 종목의 학문을 아우르는 실력을 보입니다.
 
지금은 대부분 실전되어 일부 내용만 전하지만 그의 종군 시가를 읽어보면 백성과 군사를 사랑하는 마음, 국난을 평정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시 세우겠다는 국가의 동량으로서의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러면서도 서정적 마음과 시상을 이해하고 있었고 병법의 대가였으며 맹덕신서 등 각종 책들의 저술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똑똑하고 주나라 무왕의 동생인 주공과 필적할 능력을 가진 그가 왜 황제는 되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추적을 해 봅니다.
1. 황제가 될 힘도 능력도 있었고 자신이 되면 황조를 더욱 튼튼히 출발 시킬 수 있었다.
2.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굳이 자기 아들 조비에게 황제가 되라고 하지도 았았다. 
3. 그의 무덤에도 그저 2인자인 위왕으로 남아있다.                                      
4. 그렇다고 후한의 황제인 헌제를 보필하고 그에게 충성을 바친 충신은 아니었다.       
5. 그가 후한을 부흥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을 비웃고 간언한 신하는 자기 사람이었어도 죽였다.  
6. 그가 죽자 얼마 안 되어 그의 아들은 황제가 되어 개국을 하였다.                               
 
무엇일까요?
 
저는 그가 황제가 되지 않은 것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사대부로서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위왕이 될 때까지는 관직에 욕심이 있었습니다. 이를 반대하는 세력을 가차 없이 숙청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는 끝없이 고민했던 것 같고 결국 결론은 위왕으로 남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불러 아비는 위왕으로 마지막 왕조의 사람으로 남지만 너는 굳이 관계가 없으니 새로운 왕조를 세우거라 라고 조언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정의롭고 다정다감도 했고 멀리 내다도 보았고 마음이 넓었으며 인재를 사랑하고 시스템을 바꾸고 둔전을 행하여 국가를 부흥시켰던 그는 외형상으로는 마지막 충신으로 남고 싶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재상이 아닌 왕으로서 남아 자신의 아들이 황제로서 등극할 수 있도록 미리 장애물을 제거하고 권위를 올려놓는 작업까지는 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조급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형주를 빼앗은 이후 정사 삼국지를 보면 대규모 전쟁은 없었습니다. 나라는 안정되어 갔고 그가 한 많은 행동을 보면 다음 왕조를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위해서 준비를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은 온갖 악명을 뒤집어쓰더라도 아들은 그런 말을 듣지 않도록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실제로 촉한 정통론을 외치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보아도 정사 삼국지를 보아도 (물론 정사 삼국지가 승자인 위의 역사를 중심으로 되어 버리기는 했지만서도) 실제로 칭제하고 새로운 왕조를 연 조비에 대해서는 별다른 미움이나 욕이 없지만 유난히 조조에 대해서는 많은 비난이 있었고 지금도 그를 비열하고 잔인하고 술수가 많은 효웅으로 중국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느끼는 것을 보면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고 할 것 같습니다.
 
즉 모든 비난을 지고 죽음으로서 자신의 아들이 세울 새 세상은 옛사람들의 다른 모든 구원(舊怨)을 버리고 새롭게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발굴된 그의 무덤을 보면 그의 각종 유언과도 같이 다른 황제들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검소합니다. 물론 약간의 옥기와 금은붙이가 나오기는 하고 또 일부는 도굴을 당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아들이 아비를 기려 넣은 것일 뿐 아들인 조비 즉 위문제도 사치와는 거리가 먼 무덤을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규모도 작지는 않지만 중원의 패자의 무덤으로서 크지 않고 전설처럼 72개의 의총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그의 유지를 잘 살펴보면 그의 무덤 역시 쉽게 찾을 수 있었고 그가 말했던 장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뒷사람들이 그의 사람됨과 큰 뜻을 알지 못했을 뿐이지요. 즉 누구에게도 큰 부담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백성이나 노예일지라도
 
실제로 실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은 그리고 조조를 가장 나쁜 사람으로 비난하는 소설 삼국지연의를 보아도 관우가 오관돌파를 할 동안 조조는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예가 뛰어난 들 유비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관을 돌파하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조운이 유비의 아들 유선 즉 아두를 구할 때도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까워서 인재가 아까워서 놓아준 것일 뿐이지요.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는 조조는 물론 그의 아들 조비보다도 사실 오래 삽니다. 유폐되어 행동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 후환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전조의 황제를 그대로 오랜 기간 동안 늙어죽도록 대접하고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게 한 황제는 사실 드물지요. 자기를 도와 개국을 한 충신을 토사구팽으로 잔인하게 잡아 죽인 유방이나 주원장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유비의 아들이자 촉한의 2대 황제인 유선도 동오의 마지막 황제도 죽이지 않고 그들이 편안하게 살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런 것을 촉한이나 동오의 마지막 황제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강력한 조조에게 끝까지 항전하지 않고 항복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집안과 자신, 식솔은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그럴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조비도 계승하여 그들을 나름대로 죽이지 않고 극진히는 아니라도 충분히 대접을 합니다.
 
조조가 몇 년 더 살았다면 사마의나 사마염은 새 왕조를 열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조는 그들의 야심을 본능적으로 알고 크게 중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었다면 조씨의 위는 훨씬 오래 갔을 수도 있고 팔왕의 난으로 인해 얼마 안 돼 멸망하고 오랜 기간을 분열했던 5호 16국의 난은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즉 기원 304년부터 439년까지 수와 당이 통일될 때까지의 끝없는 135년간의 전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조비는 나름대로 괜찮은 황제였지만 아버지와 같은 영웅은 아니었기에 사람을 잘 못쓰고 말았습니다.
 
역사에서는 If 즉 "아마"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지만 조조가 66세가 아니라 72-73세 정도까지 살았거나 그 스스로 칭제를 하였더라면 조조가 기초를 닦은 위나라는 통일 왕조로서 최소한 100-200년은 갔을 수도 있었다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그의 꿈은 분명히 새로운 세상의 창조였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역성혁명의 수괴가 되기에는 조조는 너무 현명했고 똑똑했고 자신감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는 버릴 수 없는 사대부로서의 자존심이 있었으며 현실적으로도 자신의 후대가 왕조를 충분히 열 준비가 되었기에 그렇게 후회 없이 자신은 신하로서 구시대의 몰락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하고 떠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역사상 사대부가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된 적은 없습니다. 사대부는 문인이고 글 읽은 사람으로서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황제가 되기에는 생각이 많았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굳이 있다면 주공 정도이겠지만 주공 역시 무왕이 만든 기초에서 문왕으로 가는 다리 역할만을 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잘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미워합니다. 잘 이해하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보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오해로 무지로 그 사람을 미워하고 질시하고 비난 합니다. 그냥 미울 뿐이기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정치인이고 큰 사람일 경우 더욱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언론, 지역, 종교와 정치적 성향으로 그냥 그렇게 믿어버리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러면 마음이 편하거든요.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거처럼 힘든 일은 없기 때문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은 공부를 합니다. 온고이지신이란 말처럼 과거를 배우며 우리는 미래를 봅니다. 오늘은 우리가 수 없이 그리고 생각했던 내 과거의 미래라는 말처럼 우리는 지나간 역사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장교는 고관대작의 아들들이 통행금지령을 어기는 것을 잡아다 몽둥이로 죽도록 치고 수도의 치안을 잡습니다. 젊은이는 황색 옷을 입고 농민 반란을 일으킨 무리를 해치우고 국가를 보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젊은 청년은 황제를 끼고 폭정을 일삼는 서량의 이민족 동탁을 제거하는 연합군의 연합을 주도합니다. 장년이 된 이 사람은 황제를 구해서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 황제를 다시 옹립하고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경제를 살려 백성을 구하고 역적을 쳐서 중원을 통일합니다. 백성을 사랑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중장기적인 정책을 펴면서 주위의 이민족을 공격하여 국가의 후환을 없앱니다.
 
인재는 자신의 적이라도 미워하지 않았고 자신과 자신의 부모까지도 모욕한 사람도 살려둡니다. 아니 오히려 중용도 하지요. 자신이 위험할 때 적과 내통한 자신의 신하들을 찾아낼 증거도 태워버립니다. "내가 신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라고 웃으면서 모두 태워 버립니다.
 
자신에 반기를 들고 수 없는 전쟁을 하며 위협을 했던 나라들의 왕들도 모두 살려주고 평생 잘 대해줍니다. 비록 어린 황제에게 좀 막 대한 부분은 있겠지만 몇 십년 동안 그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고 수 없이 음모를 꾸몄을 지라도 살려둡니다. 비록 자기 아들이 황제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는 자신이 죽은 뒤 2년 후의 일이니 그의 잘못이라 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제가 오늘 엄청 긴 글을 쓴 조조 조맹덕입니다.
 
실제의 정사 삼국지를 보면 조조는 적벽에서 지기는 했으나 이는 돌림병 때문일 뿐이고 소설처럼 크게 진적도 없으며 마등과 마초에게도 소설처럼 쫒긴 적도 없습니다. 자신의 은인도 죽인 적이 없으며 그 가족을 몰살한 적은 더욱 더 없었습니다.
 
그는 상승장군이었고 뛰어난 무인이었으며 그 이전에 뛰어난 문장가에 시인이었고 역사학자였으며 병법가였고 정치가였으며 무엇보다도 한나라의 백성인 사대부였습니다. 입신양명하여 국가를 보위하려고 했던 그의 자존심과 자긍심 그리고 애국심은 적어도 그가 죽기 전까지는 비록 희미해졌을지언정 없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살아있었습니다.
 
이것이 조조의 꿈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승상이자 재상, 대장군이자 위왕이었지만 황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꿈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꿈은 자존심이었고 자만심이었습니다. "세상사람 누구도 나를 속일 수 없지만 난 천하를 속일 수 있다"라고 말했던 유일한 사대부 출신의 실질적인 황제였습니다.
 
그것이 조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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